
▲ 조희대 대법원장. (사진=연합뉴스)
[e-뉴스 25=백지나 기자] 내 돈을 돌려받을 권리가 채권자나 세무서에 압류됐더라도 채무자 본인이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이 나왔다. 이로써 지난 25년간 유지돼온 대법원 판례가 변경됐다. 향후 채권 추심 및 강제집행 실무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사자적격을 상실할 만한 명확한 법률적 근거가 없고, 추심명령을 이유로 소를 각하하는 것은 분쟁 해결만을 지연시킬 뿐 추심채권자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 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23일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채무자의 채권에 대해 추심명령이나 체납처분 압류가 있어도 채무자가 소송할 당사자적격을 잃지 않는다”며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로 2000년 이후 25년간 이어져온 “추심명령이 있으면 채무자는 소송 못 한다”는 기존 대법원 판례가 변경됐다.
A씨는 B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A씨에게 3억900만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판결 후 A씨의 채권자가 “A 대신 내가 B한테서 돈을 받겠다”며 법원에서 추심명령을 받았고, 성남세무서도 세금 체납을 이유로 같은 돈을 압류했다.
B는 상고심에서 “A의 돈을 채권자와 세무서가 받기로 결정됐으니, A는 더 이상 소송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대법관 12대 1 의견으로 종전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추심명령이 있어도 채무자가 소송할 자격을 잃는다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추심명령은 채무자가 ‘현금을 직접 받는 것’만 금지할 뿐, 채권 자체가 채권자한테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채무자가 소송하는 것은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뿐 현금을 받는 게 아니므로 금지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채권자는 채무자의 소송에 참가할 수 있고, 채무자가 이겨도 실제 돈은 압류 때문에 채권자가 받게 되므로 채권자에게 불리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소송이 오래 진행됐거나 상고심에서 갑자기 추심명령이 나왔다는 이유로 소송 자격이 없다며 소를 각하하면, 그동안의 재판이 모두 허사가 된다”며 “분쟁의 일회적 해결과 소송경제에 현저히 반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당사자적격을 박탈했던 종전 판례를 폐기하고, 분쟁의 일회적 해결과 소송경제를 도모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며 이번 판결의 의미를 설명했다.
대법원은 지난 2000년 4월 판결에서 “추심명령이 있으면 추심채권자만 소송할 수 있고 채무자는 당사자적격을 잃는다”고 판단한 바 있다. 2009년 판결에서는 세금 체납으로 인한 압류도 마찬가지라고 봤다.
이런 법리에 따라 그동안 법원은 돈 받을 권리가 압류되면 본인이 낸 소송을 각하해왔다.
한편,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노태악 대법관은 유일한 반대의견을 냈다. 노 대법관은 “추심명령 제도는 채권자가 채무자보다 먼저 돈을 받을 수 있도록 권리 실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채무자가 먼저 소송하면 중복제소 금지 원칙상 채권자는 소송을 못 내게 되는데, 이는 제도 취지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25년간 확립된 판례를 변경하면 관련 실무에 큰 혼란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